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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를 대표하는 패션 브랜드이자 명품 브랜드로 유명한 크리스챤 디올(CHRISTIAN DIOR).

크리스챤 디올(CHRISTIAN DIOR)은 창립자의 이름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의 이름에서 유래하여 여성의류, 남성의류, 스카프, 구두, 주얼리, 향수, 시계 등의 제품 등을 제작 및 판매한느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이다.


디올의 생애

디올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하이패션 브랜드 중 하나로, 그의 디자인은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이고 우아한 스타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1905년 프랑스 서부 노르망디 그랑빌에서 다섯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정원을 취미로 가꾸며 패션에 관심이 많은 여성이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크리스챤 디올은 또래 남자아이들과는 다르게 어머니와 함께 정원에서 꽃을 가꾸거나 그림을 그리는 섬세한 남자아이였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다른 디자이너들과는 다르게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디올의 가족은 항상 고급스러운 옷과 아름다운 보석으로 치장했고 꽃으로 장식된 집 안에는 은은한 음악과 향수 냄새가 항상 감돌았다. 

크리스챤 디올의 가족사진

 10살이 되었을 무렵 가족들과 함께 파리로 이사를 갔고 그 당시 디올은 파리의 우아한 건축물과 파리지앵들에게 매료되었다. 그 때 디올의 꿈은 건축가였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건축과 예술에 대한 열정이 넘치던 그는 갤러리와 미술관을 자주 갔으며 예술가 친구들을 사귀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강압에 못 이겨 외교관이 되어야 했던 그는 정치학과에 진학했지만 예술에 빠져있었던 그는 틈나는 대로 강의를 듣지 않고 펍과 갤러리를 드나들었다.

크리스챤 디올(Christian Dior)

 

간신히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방황하는 그를 보던 아버지는 보다못해 재정적인 지원으로 아트 갤러리'자크 봉장(Jacques Bonjean)'을 열면서 꿈꾸던 예술의 세계에 첫 발을 내딛게 된다. 갤러리를 오픈한 후 평소 존경하던 화가와 조각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데 23세의 나이에 피카소, 달리 등 당시 최고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며 남다른 안목을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1930년 세계저인 공황 등 악재가 겹치면서 디올의 아버지가 파산했고 도움받아 운영하던 갤러리 또한 문을 닫아야 했다. 이로 인해 부유하던 디올의 집안은 말 그대로 풍비박산 나며 고생을 모르던 그에게 어머니와 형의 사망까지 겹치면서 계속되는 불행으로 그의 건강 또한 악화되었다. 그렇게 집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디올은 친구에게 패션 드로잉, 색칠하는 법을 배우고 자신의 그림을 팔고 모자를 만들어 오트쿠튀르(Haute-Couture) 하우스에 판매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 그림 중 일부는 '르 피가로(Le Figaro)'에 실렸다.

'르 피가로(Le Figaro)'에 실린 크리스챤 디올의 패션 드로잉

1938년 그는 디자이너 로베르 피제(Robert Piguet)의 회사에 입사하여 의상 일러스트를 그리거나 스타일을 그려주는 일을 했다. 그러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군에 입대하고 복무 후 1941년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로 돌아온 후 디자이너 뤼시앵 를롱(Lucuen Lelong)의 부티크에 입사했는데 당시 함께 일했던 동료는 지방시와 피에르 발망이다. 1946년 디올은 지인의 소개를 통해 프랑스에서 가장 부자중 한 명이며 가장 큰 직물 회사의 사장인 마르셀 부삭(Marcel Boussac)을 만나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마르셀 부삭은 당시 섬유 업계를 쥐락펴락하던 재력가였고 디올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보고 자신의 회사로 올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자신의 브랜드를 런칭하려던 디올은 이를 거절하고 부삭에게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파리 몽테뉴 거리 30번가에 자신의 이름을 딴 부티크를 열였다. 이렇게 크리스챤 디올이 탄생했다.

크리스챤 디올 부티크, 1946년


디올의 혁신과 영향

크리스챤 디올은 새로운 스타일과 접근법으로 패션업계를 변화시켰다. 그는 "New Look"이라 불리는 스타일로 여성의 실루엣을 강조하는 여성성을 부각했으며, 전통적이면서도 화려한 디자인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디올의 옷은 여성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강조하는 동시에 자유롭고 자신감 넘치는 여성상을 제시했다. 그의 디자인은 오랜 시간 동안 패션계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디올의 작품은 여전히 많은 디자이너와 패션 하우스에 영감을 주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그의 스타일은 아직도 사랑받고 있다. 

 

1947년 디올은 야심차게 생애 첫 오트 쿠튀르 패션쇼를 세상에 선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군복 같은 딱딱하고 남성적인 옷을 입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풍성하고 화려한 스타일을 선보인 이 컬렉션은 엄청난 이목을 집중시켰다. 왜냐하면 당시 파리의 패션은 새로운 트렌드도 없었고 코르셋을 없애고 심플하고 편한 여성복 디자인을 선보이던 코코 샤넬도 은퇴를 한 시기여서 파리 패션계에는 새로운 유행이 없었다. 그때 디올의 컬렉션이 열리면서 선보인 X형태의 의상 실루엣은 여태껏 본 적 없는 새로운 디자인이었습니다. 꽃봉오리에서 영감을 받아 잘록한 허리에 둥근 어깨 그리고 여러 겹의 속치마를 사용해 꽃잎 같은 느낌으로 풍성하게 퍼지는 스커트로 로맨틱함과 여성스러움의 분위기를 강조했다. 수많은 언론에서 그의 쇼를 극찬하고 열광했다. 이때 어떤 잡지사에서 'It's suc a New Look'이라고 표현한 것에서 '뉴 룩'이라는 이름이 새로 생겼다. 그리고 디올은 샤넬이 없애 버린 코르셋과 페트코트를 다시 부활시켰는데 코코 샤넬은 "여성에 대해 잘 모르는 남성들이나 저런 불편한 옷을 디자인할 수 있다"라며 비꼬았다.(실용적이고 심플함을 선호하는 현대적인 디자이너 샤넬과 화려함과 우아함을 강조하는 디올은 대조적이면서 비교되기 때문에 이는 지금까지도 논쟁이 있다.) 하지만 뉴룩은 당시의 시대 상황과 맞아떨어지면서 엄청난 사랑을 받았고 2차 대전 후 노동에서 해방되고 주부의 삶으로 돌아간 여성들은 아름답고 로맨틱한 뉴룩으로부터 욕망을 충족받았고 전쟁 후 칙칙하던 유럽 패션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여성적인 실루엣을 강조한 디올의 뉴룩(출처 : dior.com)

또 1947년 디올은 '우아한 드레스에 걸맞는 향을 만들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고 '퍼퓸 크리스챤 디올'을 설립해 향수 '미스 디올(Miss Dior)'을 발표했다.

 1949년에는 기성복 라인인 프레타 포르테(Pret-A-Porter)를 만들고 뉴욕에 기성복 매장을 열었다. 당시에는 고급 맞춤복인 오트 쿠튀르가 패션 사업의 중심이었는데 디올이 기성복 분야를 확장해 매장을 낸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행보였다. 실용적인 기성복은 미국 시장에서 판매되었고, 고급 맞춤복은 파리 부티크에서만 운영하며 철저히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했다.

 

매년 두 번씩 디올의 파리 부티크에서는 패션쇼가 열렸다. 쇼가 열릴즘이면 건물 곳곳에는 여러 종류의 꽃들과 샹들리에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관객들을 맞이하였다. 그의 패션쇼는 엄청난 인기를 자랑했고 매번 모여든 파리의 귀부인들과 유명 인사들로 인산인해였다. 이런 디올의 독보적인 상상력으로 오트 쿠튀르의 황금기를 맞이했다. 디올은 뉴룩으로 입지를 다진 후에도 다양한 스타일을 공개했다. 이 중에서 알파벳 라인으로 알려진 A라인, H라인, Y라인을 발표했다. 이렇게 자신의 컬렉션에 알파벳을 붙이면서 대중에게도 쉽게 접근했다.

왼쪽에서부터 Y,H,A라인 (출처 : pinterest.com)

알파벳 라인은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 중에서 A라인은 1960년 이후 유행한 미니의 시초가 된다.

 

1956년 디올은 프랑스 산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훈장을 받는다. 1957년에는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타임 잡지 3월호에 얼굴이 실렸고 "기계문명 시대에 패션은 인간에게 위안을 준다."라는 말로 자신의 브랜드 철학을 밝히기도 했다.

 

1957월 10월 평소 심장병을 앓고 있던 디올은 10주년 컬렉션을 앞두고 52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쓰려졌다. 그 후 디올의 오른팔 역할을 해오던 21세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이 크리스챤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

 


 

크리스챤 디오르는 패션계의 전설적인 존재로 남아 있다. 그의 디자인은 시대를 초월하여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그의 옷은 단순히 패션 아이템을 넘어서 여성의 아름다움과 자신감을 빛내는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디오르의 업적을 되새기며, 우리는 그의 창조적인 정신과 영감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마치며 디올이 어느 날 파리에서 한 벌에 몇 천만 원하는 오트 쿠튀르 패션쇼를 마치고 받은 질문에 대한 답을 적어보겠습니다.

"지금 밖에서 사람들이 하루에 만 원도 채 벌지 못하며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데, 당신의 옷은 수 천만 원입니다. 당신은 이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디올은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이 단순히 숨 쉬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빵만 먹어도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술은 왜 있을까요?

예술은 인간이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는 꿈과 환상, 아름다움을 줍니다"

 

이러한 대답은 디올이 자신이 예술을 통해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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